2009-04-30 16:07
풍자적 상상력의 새로움 또는 그 서사의 낯익음
   대선자객.hwp (26.0K) [24] DATE : 2009-10-16 12:38:47
풍자적 상상력의 새로움 또는 그 서사의 낯익음
· 서평 : 변정수 (미디어평론가 / 르네21 기획위원)
· 도서 : 대선자객 / 신규용 지음 / 개마고원, 2004

신규용, <대선자객>(개마고원)

디지털 매체가 처음 출현했을 때 많은 이들은, 2진수를 기반으로 하는 전기 신호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매체들이 디지털 기호를 매개로 하여 통합된 새로운 매체, 이른바 '멀티미디어'의 시대가 도래 했음을 선포했다. 전통적으로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왔던 문자·영상·음향 매체 들 사이의 확연한 구별이 더 이상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무의미해질 것이라는 전망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게다가 디지털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일정한 규모의 기업화된 설비를 필요로 했던 출판 공정을 개인용 컴퓨터 위로 옮겨 놓은 문서 편집/조판기 및 그래픽 에디터는 물론이려니와 그보다는 까다로운 기술을 요구하는 동영상 편집기와 음향 편집기까지도 개인용 컴퓨터에서 어느 정도는 조작할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며, 월드와이드웹을 통한 네트워킹을 이용하여 누구나 역시 개인용 컴퓨터만으로 이를 손쉽게 실시간으로 디스플레이할 수 있는 매체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이는 누구나 창조적인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전자적으로 구현해 주는 도구들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약간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대규모의 자본을 동원하지 않고도 매체에 접근하여 독립적인 메시지 생산자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대선자객>은 그 자체로 이러한 매체 환경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웅변해 주는 작품이다. 우선 이 작품의 서사 구조는 전형적인 무협 장르의 문법을 따르고 있지만, 전통적인 구분을 따르자면 무협 소설이나 무협 만화/극화, 무협 영화,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시적인 형식은 만화의 프레임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을 채워 넣는 구체적인 내용물은 영화의 스틸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디지털 합성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상상력은 이 작품의 구성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각 분야의 장르적 상상력으로 환원되지 않는 통합적 상상력이다.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무협지의 서사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은 물론이려니와 만화/극화적으로 장면들을 구성해 낼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필요한 이미지들을 수집하여 그것을 매끄럽게 합성해 낼 수 있는 기술적 능력까지를 두루 갖추고 있어야만 비로소 구체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상상력이다.
피시통신이라는 이름으로 양방향 매체 시대가 열린 지 10년이 넘었으며, 특히나 월드와이드웹에 기반한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되면서부터 '전국민 인터넷 시대'라는 요란한 팡파레 속에서, 개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신장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동안 현실에 대한 풍자도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숱한 통신 작가/논객이 줄을 이었다. 개중에는 빼어난 서사로 대중들을 사로잡은 풍자 문학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기발한 착상으로 찬탄을 자아낸 합성 사진도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흔히 '패러디'라는 용어로 뭉뚱그려지는 이러한 흐름을 의심할 수 없는 한 시대의 문화적 트랜드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딴지일보>의 출현으로, 특히 그패픽 이미지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 풍자적 상상력이 더욱 고양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한데 버무려 일련의 합성 사진을 자기 완결적 서사를 가진 한 편의 극화로 구성해 낸 예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대선자객>은 바로 거기에 자리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선자객>은, 이 작품이 불러일으킨 폭발적인 인기에 자극을 받아 앞으로 이러한 형식의(또는 더 새로운 형식의) 장르 통합적인 작업들이 더 많은 이들에 의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리라는 전망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암시이기도 하다. 창조적 상상력의 문을 처음 여는 것은 어쩌면 천재적인 재능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그 문이 열리고 나면 그로 인해 전사회적으로 촉발되기도 하고 고양되기도 하게 마련이니까. 디지탈 매체의 출현으로 형성된 새로운 매체 환경에 주목하는 이라면 <대선자객>의 이러한 의미를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찍이 문화평론가 김창남은 "한국에 수준 높은 정치 코미디가 없는 이유는 정치 자체가 코미디이기 때문"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이해관계를 달리 하는 사회 집단들이 그것을 조정하는 과정을 근대적인 의미의 '정치'라고 할 때, 한국에 말 그대로의 '정치'가 존재했던 적이 있었는지부터가 의문이기도 하다. 요컨대 한국 사회에서 '정치'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걸고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 '(직업적인) 정치인'들이 벌이는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말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아래로부터의 힘'에 의해 두 번이나 정권을 무너뜨린 역사적 경험을 가진 유일한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어쩌면 한 순간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남의 일인 양하는 태도 때문에라도 그 '두 번'이 모두 시쳇말로 "죽 쒀서 개 주는" 꼴로 귀결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려나 <대선자객>이 담고 있는 내용이 자리하는 지점은 다름 아닌 이곳일 터이다. 한국 사회에서 입 가진 사람 치고 '정치'에 대해 '일가견'이 없는 사람이 없다거나 '정치 평론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고 또 '정치' 얘기 만한 술 안주거리도 없다고 할 정도로 정치 담론은 과잉되어 있는데, 정작 정치 그 자체의 모습은 '여의도유치원'에서 조금도 성장할 줄을 모른다는 이율배반의 틈새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역설적인 상황을 '풍자'하기에 무협만큼 어울리는 서사 구조를 찾아 내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무협지의 서사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정치 담론을 무협의 서사에 기대어 풍자하는 것은 때로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수십 년 동안의 일당 독재 아래에서 정치적 권리가 극도로 억압되어 있던 타이완이 무협지의 발원지요 온상이었다는 역사적 정황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현실을 떠난 초역사적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나 선/악 또는 정/사의 이분법이 선험적으로 전제된다는 점에서 대중에 잠재된 정치적 욕구를 오도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즉 정치 과정으로부터 소외된 대중의 정치적 욕구를 '대리 만족'으로 희석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소외 구조를 유지시키는 사회적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무협지뿐 아니라 예컨대 '할리우드 액션' 따위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문제이다.
게다가 또 다른 측면에서, 앞서 말한 '정치의 결핌'과 '정치 담론의 과잉'이라는 역설은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정치 과정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데 큰 몫을 하기도 한다. 여성들이 일상적인 공간에서 좀체로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결코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정치공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작금의 '정치 담론'들에 관심이 없을 뿐이고 그 '과잉'에 진저리를 치고 있는 것뿐이다. 요컨대 '할리우드 액션'과 '무협'은 그 자체로 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서사라는 점에서도 대중들의 '정치에서의 소외'를 더욱 (게다가 여성에게는 이중으로) 공고화할 뿐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많은 독자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무협지의 서사가 적어도 기존의 조악한 '정치 담론'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대중들에게 친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정치 결핍'의 현실 자체가 '무협지' 수준으로 묘사된다 해도 그럴듯해 보일 만큼이나 우스꽝스럽기도 하거니와, 더 본질적으로는 '정치 (담론) 과잉'으로 나타나곤 하는 대중들에 잠재된 정치적 욕망이 이러한 현실을 기껏해야 '무협지' 수준, 즉 선/악 또는 정/사의 이분법에 기반하여 선/정의 악/사에 대한 투쟁과 승리가 지배하는 세계로 여기고 싶어 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대선자객>은 그 서사 구조 안에서 '무협지'스럽기 짝이 없는 정치 현실을 탁월하게 재현해 내고 있는 한편으로, 서사의 바깥에 있는 수용 맥락이라는 메타적 지평에서 더더욱 대중의 '정치에서의 소외'라는 또다른 차원의 현실을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요컨대 이 작품이 '무협지'의 서사를 취하고 있는 한, 그 서사 안에서 묘사하고 있는 정치 현실이 그라운드 안의 경기라면 이 작품을 보며 재미를 느끼는 독자들은 스탠드 위의 '응원단'인 셈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일반 대중은 결코 그라운드 위의 선수가 아니며, 그저 재미난 구경거리를 즐기며 고작 그 중 한 쪽에 '응원'을 보내는 것을 알량한 '정치 참여'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엄청난 착각에 사로잡혀 있다. 스탠드 위에서 정치에 관해 끊임없이 발언하고 논평하고 개입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라운드로 뛰어들어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나설 생각은 없는 대중에게 무협지의 서사는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한 풍자적 정치 담론의 형식일 것이다.
물론 '풍자'는 웃자고 하는 것이다. '진지한 풍자'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그래서 <대선자객>은 적어도 무협의 서사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매우 즐거운 웃음을 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불법 자금에 기대어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해 온 세력은 '징치해야 할 악의 무리'도 아니고,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해야 할 사파'도 아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을 어긴 범법자들일 뿐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그들을 대상으로 법을 집행하는 이들은 '악의 무리를 징치하는 선의 무리'도 아니고, '사파를 심판할 권능을 가진 정파'도 아니다. 법법자들을 단속하는 것은 그들이 봉급을 받고 하는 일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탈역사적/초역사적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무협지가 결코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현재적 역사이다. 그 간극을 해소하는 것은 이 작품을 신명나게 즐긴 수용자들이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서 감당해야 할 몫일 것이다.

 

<대선자객>의 작가도 틀림없이 그러할 것이고 또한 이 작품에 열광한 독자들 또한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동의하겠지만, 더 이상 정치 현실이 무협지의 서사를 빌어서는 풍자될 수 없는 그런 세상에 대한 소망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있을 것이다. 대중이 '정치'의 관객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주체'일 수 있다면, 현실은 결코 무협지의 서사처럼 단순하지도 평면적이지도 않을 것이며 따라서 당장 자신의 이해관계가 절박하게 놓여 있는 문제가 무협지로 여겨질 때 속없이 덩달아 들뜰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이겨야 하는 편으로 설정이 되어 있다 해도 기분이야 나쁘지 않겠지만, 그 이전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풍자'하며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이미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도통한 사람이거나 매우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사람일 테니까 말이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가 정직하게 걸려 있는 '정치'를 어떻게 웃음거리나 구경거리로 만들 수 있냐든가, '정치'는 풍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엄숙주의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정치 현실 특히나 정치인은 얼마든지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문제는 풍자의 주체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체를 소외시키는 풍자의 서사이다. 요컨대 훌륭한 정치 풍자는 그 대상과 주체 사이의 놓여 있는 정치적 갈등의 본질을 정확히 재현하며, 풍자를 하는/즐기는 사람은 의연히 정치 행위의 관객이 아닌 주체로서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런 격조 있는 풍자가 이루어지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는, <대선자객>이 묘사하듯이 마치 무협지 속의 인물들처럼 '나의 이해관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이 현실적인 정치 세력으로서 힘을 행사하고 있는 한국 정치의 비극이 하루빨리 막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겠지만, 더 이상 익명의 대중으로서 관객 또는 '응원단'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개개인의 정치적 실천도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대선자객>의 정/사 이분법 구도에 공감하기 때문에 더욱 재미를 느꼈을 '무협 서사'에 충분히 친숙한 독자들에게 이 작품을 즐기는 가운데에서도 그런 비판적 성찰의 계기를 마주하기를 기대한다면, 그저 가볍게 웃어넘길 수도 있는 한 편의 무협 극화에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죽했으면 그렇듯 왜곡된 현실이 낳은 왜곡된 형식으로라도 표현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이나 끓어오르는 정치적 욕망이 우리 안에 틀림없이 잠재되어 있으며, 그것이 얼마든지 좀더 건강한 사회를 위한 에너지로 분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직은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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